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훈요 10조 (문단 편집) ==== 반론 ==== 우선 날조설에서는 최항이 훈요 10조와는 관련이 낮다고 보는데, 오히려 최항은 훈요 10조 문서를 소지했을 가능성이 큰 인물이다. 최항은 현종이 즉위하기 전부터 그를 보필한 측근이자 스승이며, 선왕인 목종이 직접 최항에게 후계자인 현종을 잘 보필해 줄것을 부탁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훈요 10조 원본을 목종에게 받았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게다가 위에 언급한, 사찰건립 금지 조항을 어긴 것을 지적하는 최승로의 상소를 보면 직접 훈요 10조를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훈요 10조 2번 조항과 비슷한 내용을 인용해서 사찰 건립을 비판했다. 아무리 일국의 태조가 남긴 유훈이 신성하고 큰 가치를 지녔다고 해서 후대의 왕들이 이를 무조건 따랐으리란 법은 없다. [[최유선]]은 훈유10조 2번 조항을 인용해 문종에게 흥왕사를 짓지 말라고 했지만 문종은 결국 지었다. 조선시대에도 태조가 자신을 고향인 함흥 땅에 묻으라는 유언을 남겼지만, 왕실의 체면과 제사를 고려해 태종은 이를 따르지 않았다. 그 외에도 후대에 전왕의 뜻과 다른 방향으로 일이 진행된 사례들이 있다. 고려사절요가 완성된 조선시대 이후에도 훈요 10조의 내용을 비판한 사람은 있지만 그 자체의 진위 논란은 없었으며, 훈요 10조가 다르게 기록된 사료나, 훈요 10조가 다르게 기록되었다고 주장한 사료조차 발견되지 않았다. 한 국가의 태조가 남긴 유훈이 실제로는 조작되었다는 사소한 증거라도 있었다면, 정통성을 극히 중요하게 여기는 유학자들이 가만히 있었을 리 없다. 하다 못해 그런 의혹이라도 가졌어야 정상인데 그 조차 없다는 것은 조선의 학자들도 훈요 10조 조작설이 의미없음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반박이 없었다고 그 내용이 꼭 진실이라 주장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역사가 후대에 뒤집힌 사례는 얼마든지 있기에.] 그리고 '''훈요 10조의 내용이 사실이어도, 그것이 현대의 지역감정을 정당화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현대의 지역주의는 1960년대 산업화 이후 지역간 (소득)불균형 발전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조선시대와 일제시대에는 지금같은 영호남의 지역주의는 없었다. 조선왕조는 한양이외의 모든 지역으로 반역자를 유배보냈었다). 근대에 들어와서 최항-최제안 조작설을 처음 주장한 사람이 일본인 학자인 이마니시 류(今西 龍)이다. 이 때문에 학계에서는 이마니시 류의 조작설 자체가 오히려 고려 왕조의 정통성을 훼손시키려는 [[식민사관]]적 의도가 있는 것 아니냐는 추측을 하기도 한다. 역설적이게도 이마니시 류의 최항-최제안 조작설을 반박한 사람에는 친일파로 알려진 [[이병도]]도 있었다.[[분류:고려]][[분류:태조(고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